티스토리 뷰
목차

어릴 때 부모님이 “시장에 간다”고 하면 집에 남아 있기보다 따라나서고 싶었다. 장을 보러 가는 일은 어른에게 필요한 식재료와 생활용품을 사는 일이었지만, 어린 내 눈에는 골목 하나가 통째로 구경거리처럼 느껴졌다. 시장 입구에 가까워질수록 사람 목소리가 커지고, 가게마다 쌓여 있는 물건의 색깔과 냄새가 달라졌다. 무엇을 꼭 사야 하는지 잘 몰라도 부모님 옆을 따라 걷는 것만으로 심심할 틈이 없었다.
지금처럼 필요한 물건을 검색해서 주문하고 문 앞에서 받는 방식과 달리, 시장에서는 사는 과정 자체를 눈앞에서 볼 수 있었다. 채소를 고르고 무게를 달고, 값을 묻고, 봉투에 담는 짧은 과정마다 사람과 사람이 마주쳤다. 나는 장바구니를 든 부모님 옆에서 그 모습을 구경했고, 때로는 먹거리 앞에서 발걸음을 늦추거나 장난감과 생활용품이 놓인 좌판을 한참 바라보기도 했다. 그래서 시장에 간다는 말은 단순한 심부름이 아니라 평범한 하루에 생기는 작은 외출처럼 들렸다.
시장 입구부터 볼거리가 끊이지 않았다
시장은 입구부터 볼거리가 끊이지 않는 공간이었다. 한쪽에는 채소와 과일이 색깔별로 쌓여 있고, 조금만 더 걸으면 생선이나 건어물, 반찬, 옷과 신발, 생활용품을 파는 가게가 이어졌다. 가게마다 물건을 진열하는 방식도 달라서 같은 골목을 걸어도 시선이 계속 움직였다. 어른에게는 필요한 것을 찾아 빨리 장을 보는 동선이었겠지만, 어린아이에게는 처음 보는 물건을 하나씩 구경하는 길에 가까웠다.
특히 시장은 소리와 냄새까지 함께 기억되는 공간이었다. 상인이 손님을 부르는 목소리, 비닐봉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저울 위에 물건이 올라가는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먹거리 가게 근처에서는 익는 냄새와 국물 냄새가 섞였고, 과일가게 앞에서는 달큰한 향이 났다. 이런 자극이 짧은 간격으로 계속 바뀌니 그냥 걷기만 해도 새로운 장면을 만나는 기분이 들었다.

또 시장 골목은 정해진 한 가지 모습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계절에 따라 앞쪽에 놓이는 채소와 과일이 달라지고, 명절이나 특별한 때에는 평소보다 물건과 사람이 많아졌다. 비가 오면 천막 아래로 물방울이 떨어지고, 더운 날에는 선풍기가 돌아가는 가게 앞에서 잠깐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다. 같은 시장에 여러 번 가도 그날그날 풍경이 조금씩 달랐기 때문에 익숙하면서도 지루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어느 가게에서 무엇을 사는지 기다리는 동안에도 나는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해서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게 앞에 가지런히 놓인 물건을 보는 것, 사람들이 어떻게 고르고 값을 묻는지 지켜보는 것, 장바구니가 조금씩 무거워지는 과정을 따라가는 것 자체가 놀이처럼 느껴졌다. 시장이 즐거웠던 첫 번째 이유는 결국 ‘살 것’보다 ‘볼 것’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장보기를 기다리게 만든 시장의 먹거리
시장에 따라가고 싶은 마음을 더 크게 만든 것은 먹거리였다. 장을 보러 나온 어른은 필요한 것을 먼저 챙기지만, 어린아이의 눈은 자연스럽게 김이 오르거나 냄새가 퍼지는 쪽으로 향했다. 떡, 튀김, 어묵, 빵이나 과자처럼 시장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간식은 식재료를 파는 가게와 전혀 다른 분위기를 만들었다. 굳이 무엇을 사 먹지 않아도 조리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발걸음이 느려졌다.
시장 먹거리가 특별했던 이유는 만드는 과정을 바로 앞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죽이 모양을 갖추고, 뜨거운 철판이나 기름에서 익어 가고, 완성된 음식이 종이봉투나 작은 그릇에 담기는 과정이 한눈에 들어왔다. 포장된 상품을 진열대에서 집는 것과 달리 기다리는 동안 냄새가 먼저 다가왔고, 바로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가 따라붙었다. 그래서 부모님이 장을 보는 시간이 길어져도 먹거리 가게 근처에서는 기다림이 덜 지루했다.

물론 시장에 갈 때마다 무엇인가를 사 먹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집마다 형편과 습관이 달랐고, 장을 보러 간 목적도 달랐다. 다만 당시 시장에서는 장을 보는 동선과 간식을 만나는 동선이 자연스럽게 겹쳤다. 부모님이 물건을 고르는 동안 아이는 옆 가게의 음식이나 과자를 바라보고, 허락을 받으면 작은 간식 하나를 손에 들 수 있었다. 이런 가능성만으로도 시장 나들이에 기대감이 생기기 충분했다.
먹거리 앞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또 하나의 기억을 만들었다. 뜨거운 음식을 바로 먹지 못해 잠깐 식히거나, 봉투를 조심히 들고 부모님을 다시 따라가는 작은 행동까지 시장의 흐름 속에 들어 있었다. 음식 자체의 맛도 중요했지만, 장을 보다가 우연히 만났다는 상황이 그 맛을 더 특별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시장을 떠올리면 가게 이름보다 먼저 따뜻한 김이나 달큰하고 고소한 냄새가 생각나는 경우가 많다.
살 수 없어도 구경만으로 즐거웠던 작은 물건들
부모님이 식재료를 고르는 동안 나는 내 관심을 끄는 작은 가게들을 따로 발견하곤 했다. 장난감, 문구류, 머리핀, 양말, 신발처럼 생활용품과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물건이 한곳에 뒤섞여 있는 좌판은 지나치기 어려운 구경거리였다. 꼭 살 계획이 없어도 색깔과 모양이 다양한 물건이 좁은 공간에 빽빽하게 놓여 있다는 것 자체가 재미있었다.
시장에서는 물건을 유리 진열장 안에서 멀리 보는 것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접하는 경우가 많았다. 작은 장난감이나 문구류가 바구니에 담겨 있거나, 옷과 신발이 통로 쪽까지 나와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어린아이에게는 이런 진열 방식이 보물찾기처럼 느껴질 수 있었다. 같은 종류의 물건 사이에서 마음에 드는 색이나 모양을 찾고, 가격표를 읽어 보거나 부모님에게 한 번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잘 갔다.

무엇을 사 달라고 조르는 일과 구경하는 즐거움은 꼭 같은 것은 아니었다. 갖고 싶은 마음이 생기더라도 모든 것을 살 수 없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알게 됐고, 그래서 ‘오늘은 그냥 보는 것’도 시장에 따라가는 재미의 일부가 됐다. 부모님이 물건을 고르는 동안 옆 좌판을 잠깐 둘러보는 몇 분만으로도 외출이 훨씬 풍성하게 느껴졌다.
이런 경험은 시장이 단순히 집에 필요한 것을 사는 장소가 아니라는 인상을 남겼다. 어른과 아이가 관심을 두는 물건은 달랐지만 같은 골목 안에서 각자 볼거리를 찾을 수 있었다. 부모님은 가격과 품질을 살피고, 아이는 색깔과 모양을 먼저 봤다. 같은 장소를 서로 다른 기준으로 바라보면서도 함께 움직였다는 점이 시장 나들이를 가족의 일상적인 외출처럼 느끼게 했다.
부모님 옆에서 자연스럽게 보게 된 장보기의 방식
부모님을 따라 시장을 다니면서 재미만 느낀 것은 아니었다. 특별히 가르쳐 주지 않아도 물건을 고르는 방법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자연스럽게 보게 됐다. 부모님은 채소의 상태를 살피거나 필요한 양을 정했고, 상인에게 가격을 묻고 물건을 받아 장바구니에 넣었다. 어린 나는 그 옆에서 기다렸지만, 반복해서 따라다니다 보면 ‘사는 일’에도 순서와 판단이 있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됐다.
시장에서는 대화가 거래의 한 부분이었다. 단골 가게라면 안부를 묻기도 하고, 필요한 양을 설명하거나 어떤 물건이 좋은지 물어보기도 했다. 모든 시장과 모든 가게가 똑같지는 않았지만, 얼굴을 마주 보고 말을 주고받는 방식은 익숙한 장보기 풍경이었다. 부모님과 상인이 짧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물건만 사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거래가 이루어진다는 점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장바구니를 함께 들거나 가벼운 봉투 하나를 맡는 일도 아이에게는 작은 역할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따라간 것뿐인데, 돌아올 때 손에 무언가 하나 들고 있으면 나도 장보기에 참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집에 도착해 산 물건을 꺼내 놓을 때 시장에서 봤던 가게와 물건이 다시 연결되면서 외출이 끝났다는 느낌도 분명해졌다. 시장에 다녀오는 일은 출발부터 귀가까지 한 흐름으로 기억됐다.
무엇보다 부모님과 나란히 걸었던 시간이 시장의 풍경과 함께 남았다. 장을 보는 동안 대단한 행사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평소 집 안에서 보는 모습과 달리 부모님이 물건을 고르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움직이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옆에서 구경하며 따라갔다. 그래서 시장에 대한 기억은 가게와 물건만의 기억이 아니라 부모님의 생활 속에 잠시 함께 들어가 본 경험으로 남아 있다.
요즘은 장을 보는 방식이 훨씬 다양해졌다. 대형마트에서 한꺼번에 살 수도 있고, 휴대전화로 필요한 물건을 주문하면 직접 시장 골목을 걷지 않아도 된다. 편리함만 놓고 보면 지금의 방식이 훨씬 효율적이지만,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시장에 갔을 때 느꼈던 즐거움은 효율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때 시장이 좋았던 이유는 무엇 하나 때문만은 아니었다. 골목마다 바뀌는 풍경, 가까이에서 들리던 상인들의 목소리, 먹거리 냄새, 눈길을 붙잡던 작은 물건, 그리고 부모님 옆에서 내가 맡았던 사소한 역할이 한꺼번에 섞여 있었다. 장을 보는 목적은 어른에게 있었지만 그 시간을 따라간 아이에게는 구경과 발견이 이어지는 작은 여행이었다. 그래서 오래된 시장을 지나갈 때면 무엇을 샀는지보다 부모님 옆에서 이것저것 바라보며 천천히 걸었던 시간이 먼저 떠오른다.
'그 시절 생활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종이인형 옷을 직접 오려 입혔던 기억, 가위질까지 놀이였던 시절 (0) | 2026.09.03 |
|---|---|
| 라디오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길 기다리던 시간, 신청곡 한 곡이 특별했던 이유 (0) | 2026.09.02 |
| 메신저 접속 상태로 기분을 표현하던 문화, 온라인과 자리 비움에 마음을 담던 시절 (0) | 2026.09.02 |
| 문자메시지 글자 수를 줄이기 위해 사용했던 표현, 짧은 문자에 담긴 그 시절의 언어 (0) | 2026.09.01 |
| 동네 슈퍼에서 외상으로 과자를 사던 시절, 장부 한 줄에 담긴 동네의 믿음 (0) | 2026.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