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자취를 시작하기 전에는 혼자만의 공간이 생긴다는 사실이 가장 크게 느껴졌다. 늦게 자든, 무엇을 먹든, 방을 어떻게 꾸미든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 자유롭게만 보였다. 하지만 막상 생활을 시작하고 나니 자유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그동안 다른 누군가가 자연스럽게 해 주고 있던 수많은 일이었다.밥 한 끼를 먹는 일부터 빨래와 청소, 공과금 납부, 장보기까지 모두 내가 챙기지 않으면 그대로 멈춰 있었다. 각각은 사소한 일처럼 보였지만 매일 반복되면서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돈을 필요로 했다. 처음 자취하며 힘들었던 것은 특별한 사건보다 이런 작은 생활 문제가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사실이었다.생활비는 월세만 계산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자취를 시작하기 전에는 가장 큰 지출이 월세라고 생각하..
명절이 가까워지면 맛있는 음식이나 오랜만에 만날 친척들보다 먼저 떠오르던 일이 하나 있었다. 낮에는 북적이는 분위기가 즐거웠지만, 밤이 되면 그 집에서 그대로 자야 한다는 사실이 어린 마음에는 꽤 크게 느껴졌다. 평소 쓰던 내 이불도, 익숙한 방도 아닌 곳에서 사촌들과 한 방에 누워 잠을 청해야 했기 때문이다.낮 동안에는 여러 사람이 드나들고 음식 냄새와 이야기 소리가 집 안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밤이 깊어 불이 꺼지고 낯선 천장과 문틈의 빛이 보이기 시작하면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친척집에서 자는 일은 명절의 당연한 일정처럼 받아들였지만, 어린 시절의 나에게는 설렘과 불편함이 묘하게 섞인 특별한 경험이었다.명절 저녁, 친척집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명절날 친척집에 도착하면 평소 조용하던 ..
고무줄놀이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누군가 앞에 서서 규칙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던 모습이 아니다. 이미 놀고 있는 친구들 옆에 서서 발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줄을 언제 밟고 언제 넘어야 하는지를 눈으로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 나도 줄 안으로 들어갔던 과정이 먼저 떠오른다. 처음에는 동작 이름도 몰랐고 왜 그 순서대로 움직여야 하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몇 번 보고 몇 번 틀리다 보면 몸이 먼저 다음 동작을 기억했다.고무줄놀이는 그렇게 규칙을 외워서 시작하는 놀이보다 함께 놀면서 규칙을 알아 가는 놀이에 가까웠다. 친구가 성공하면 그대로 따라 해 보고, 줄에 걸리면 어디에서 틀렸는지 옆에서 알려 주는 말을 듣고 다시 시도했다. 높이가 올라갈수록 방법이 달라지고 노래가 바뀌면 발동작도 달라졌지..
학교가 끝난 뒤 친구들과 어디로 갈지 특별히 정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발길이 향하던 곳이 있었다. 김이 서린 유리창 너머로 빨간 떡볶이 양념이 보이고, 주방에서는 라면 끓는 냄새가 퍼지던 동네 분식집이었다. 여러 메뉴를 마음껏 시킬 수 있는 형편이 아니어도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라면 한 그릇을 가운데 놓고 젓가락을 번갈아 뻗으며 먹다 보면 배를 채우는 것보다 친구들과 함께 앉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더 중요하게 느껴졌다.그때의 라면 한 그릇은 지금처럼 혼자 빠르게 먹는 간편식과는 조금 다른 기억으로 남아 있다. 누가 더 많이 먹었는지 따지기보다 국물 한 숟갈, 면 한 젓가락을 자연스럽게 나누던 풍경 속에는 당시 학생들의 용돈 사정과 분식집 문화, 그리고 친구 관계가 함께 들어 있었다. 지금 떠올려 보면 ..
예전에는 보고 싶은 방송을 다시 보는 일이 지금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정해진 시간에 TV 앞에 앉지 못하거나 다른 일을 해야 하는 날에는 비디오테이프를 준비해 녹화해 두는 방법이 가장 든든했다. 나도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놓치고 싶지 않아 미리 빈 테이프를 넣어 두고 방송이 시작되기만 기다린 적이 있었다.그런데 그렇게 준비를 해 놓고도 막상 시작 순간을 놓쳐 녹화 버튼을 늦게 누르는 일이 있었다. 화면에서는 이미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고, 나는 뒤늦게 리모컨이나 VCR의 녹화 버튼을 누르며 ‘앞부분이 얼마나 지나갔을까’부터 생각했다. 몇십 초나 몇 분에 불과했을지도 모르지만, 당시에는 그 빈자리가 생각보다 크게 느껴졌다.방송이 시작되기 전에 비디오테이프부터 준비했다TV 방송을 비디오테이프로 남기려면 방송이..
컴퓨터를 켜고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사진첩이나 방명록만이 아니었다. 화면 한쪽에 자리 잡은 작은 미니미와 미니룸, 그리고 배경에 깔린 음악까지 모두 그 사람의 취향을 보여주는 장치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아이템을 발견하면 도토리 잔액을 확인하고, 부족하면 충전할지 말지 한참 고민하곤 했다.실제 돈으로 바꾼 사이버머니를 다시 가상의 옷이나 배경에 쓴다는 것이 지금 기준으로는 별것 아닌 소비처럼 보일 수 있지만, 당시에는 온라인 공간을 ‘내 방’처럼 꾸미는 일이 꽤 진지한 취미였다. 당시에는 미니홈피에 들어갈 때마다 오늘은 무엇을 바꿀지, 남은 도토리로 어디까지 꾸밀 수 있을지를 살펴보는 것 자체가 접속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도토리를 충전하면 무엇부터 살지 고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