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디버디에 접속하면 가장 먼저 친구 목록보다 내 대화명부터 살피던 때가 있었다. 어제 적어 둔 문장이 오늘의 마음과 맞는지, 누군가에게 너무 티가 나지는 않는지, 괜히 아무렇지 않은 척 보이지는 않는지 한참 들여다보곤 했다. 대화명은 이름을 표시하는 칸이었지만, 그 시절 우리에게는 작은 일기장이자 은근한 신호였다.직접 말하기는 쑥스럽고 아무 말도 하지 않기에는 마음이 복잡할 때, 짧은 문장 하나가 대신 나섰다. 좋아하는 노래 가사처럼 보이는 말, 의미를 알 듯 말 듯한 영어 단어, 일부러 띄어 쓴 문장과 특수문자까지 모두 감정의 일부가 되었다. 버디버디 대화명을 떠올리면 메신저 기능보다도, 마음을 곧장 말하지 않고 살짝 비껴 표현하던 당시의 분위기가 먼저 생각난다.대화명은 이름보다 오늘의 기분을 보여주는..
방학이 시작되던 날에는 시간이 끝없이 많아 보였다. 생활계획표의 동그란 시계 안에는 공부, 독서, 운동 같은 계획을 반듯하게 적어 넣었지만, 정작 내 마음은 방학 동안 무엇을 하며 놀지에 더 가 있었다. 개학은 아주 먼 훗날의 일처럼 느껴졌고, 방학 숙제는 며칠만 마음먹으면 금방 끝낼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래서 하루 이틀 미루던 숙제는 어느새 책상 한쪽에 그대로 쌓였고, 달력의 마지막 날짜에 가까워질수록 보지 않으려 해도 자꾸 눈에 들어왔다. 결국 개학 전날이 되어서야 공책과 색연필, 읽지 못한 책과 밀린 일기장을 한꺼번에 펼쳐 놓았다. 방학 마지막 날의 집 안에는 끝나가는 휴일의 아쉬움보다 숙제를 제시간에 끝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조급함이 더 짙게 감돌았다.방학이 길수록 숙제를 더 미루게 되었던..
학교 수업이 끝난 뒤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동네 골목 안쪽 오락실에 들르던 날이 있었다. 주머니 속에는 며칠 동안 아껴 둔 동전 몇 개가 있었고, 그 작은 금속 조각들이 손바닥에서 부딪히는 소리만으로도 마음이 급해졌다. 문을 열면 여러 대의 브라운관 화면이 서로 다른 색으로 번쩍였고, 조이스틱을 움직이는 소리와 버튼을 연달아 누르는 소리가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그날은 잠깐 구경만 하겠다는 생각으로 들어갔던 것 같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게임 앞에 앉아 동전을 하나 넣고 나면 다음 판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 판만 더 하면 더 멀리 갈 수 있을 것 같았고, 조금 전에 실수한 장면을 이번에는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주머니를 확인할 때마다 동전은 줄어들었고, 마지막에는 집에 돌아갈 때까지..
카세트 플레이어에서 음악을 듣다가 소리가 갑자기 늘어지고 멈추면 가장 먼저 테이프를 꺼내 보곤 했다. 투명한 창 사이로 보이는 갈색 테이프가 느슨하게 풀려 있거나 기기 안쪽에 조금 끼어 있으면, 서랍이나 필통에서 연필 한 자루를 찾았다. 연필 끝을 카세트테이프의 톱니 모양 구멍에 끼우고 천천히 돌리면 늘어진 테이프가 다시 감기는 모습이 보였다.카세트테이프를 연필로 돌려본 경험은 당시 음악을 들었던 사람이라면 한 번쯤 떠올릴 만한 장면이다. 단순히 되감기 버튼을 대신한 행동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테이프의 구조를 눈으로 이해하고 고장 난 물건을 직접 살려보려던 생활 습관이 담겨 있었다. 좋아하는 노래가 다시 흘러나올지 확인하기까지의 긴장감도 이 작은 행동을 오래 기억하게 만든다.테이프가 늘어져 음악이 멈..
소풍 전날 밤이면 평소보다 큰 가방을 방 한가운데 펼쳐 놓았다. 도시락과 물통, 돗자리처럼 빠뜨리면 곤란한 준비물이 먼저였지만, 이상하게도 가장 자주 열어 본 곳은 간식이 들어 있는 주머니였다. 봉지를 하나씩 꺼내어 바라보고 다시 넣으면서 내일 누구와 무엇을 나눠 먹을지 머릿속으로 그려 보던 시간부터 소풍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가방 속 간식은 배를 채우기 위한 음식만은 아니었다. 친구에게 건넬 한 줌의 과자였고, 오전 내내 걷고 난 뒤 꺼내 먹을 작은 보상이었으며, 도시락을 다 먹은 다음에도 자리를 쉽게 뜨지 않게 해 주는 즐거움이었다. 어디서든 바로 사 먹으면 된다는 생각이 없었기에 무엇을 챙겨 가느냐가 제법 중요한 고민이었고, 그 고민까지 포함해 소풍날의 기억이 되었다.소풍 전날, 간식부터 펼쳐 놓..
운동회 날 아침에는 평소보다 학교 가는 길이 짧게 느껴졌다. 운동장 위로 만국기가 걸리고 스피커에서 음악과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면, 늘 보던 학교가 하루 동안 다른 장소로 바뀐 것 같았다. 체육복과 운동화를 챙겨 입었지만 마음은 수업을 들으러 가는 날보다 소풍을 앞둔 날에 가까웠다. 오늘은 내가 어떤 경기에 나가는지, 친구들과 어느 자리에서 응원할지, 가족이 언제 운동장에 도착할지가 하루 종일 이어질 궁금증이었다.초등학교 운동회 날 가장 기다렸던 순간은 사람마다 달랐을 것이다. 달리기 순서를 기다린 아이도 있었고, 반 전체가 힘을 모으는 단체 경기를 좋아한 아이도 있었으며, 가족과 도시락을 펼치는 점심시간을 손꼽은 아이도 있었다. 내가 이 시절을 떠올리면 한 장면만 고르기보다 입장식에서 달리기, 점심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