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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시간이 되면 거실의 텔레비전 앞은 가족이 자연스럽게 모이는 장소가 되곤 했다. 지금처럼 각자 휴대전화나 태블릿으로 원하는 영상을 골라 보는 환경이 아니어서, 텔레비전 한 대에서 무엇을 볼 것인지는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특히 형제끼리 보고 싶은 프로그램의 시간이 겹치는 날이면 리모컨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거실 분위기가 금세 달라졌다.
내가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곧 시작하려는데 형제가 다른 채널을 보고 있으면 괜히 마음이 급해졌다. “이것만 보고 바꿀게”라는 말을 믿고 기다리다가 프로그램 앞부분을 놓치면 억울했고, 반대로 내가 먼저 TV를 보고 있을 때 채널을 바꿔 달라는 말을 들으면 왜 내가 양보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지금 생각하면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당시에는 내가 기다린 시간을 빼앗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텔레비전 채널 선택권을 두고 형제와 싸웠던 기억에는 단순히 리모컨을 차지하려 했던 모습만 남아 있지 않다. 서로 취향이 다르다는 사실을 처음 분명하게 느끼고, 한정된 시간과 한 대의 TV를 함께 쓰려면 결국 약속과 양보가 필요하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배웠다. 작은 거실에서 벌어진 채널 경쟁은 당시 가족의 생활 방식과 형제 관계를 함께 보여 주는 기억이었다.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달라서 저녁마다 의견이 갈렸다
형제끼리 채널 문제로 다투는 가장 단순한 이유는 취향이 달랐기 때문이다. 한쪽은 만화나 예능처럼 바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다렸고, 다른 쪽은 스포츠나 드라마처럼 정해진 시간에 이어서 봐야 하는 프로그램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평소에는 별문제가 없었지만 두 프로그램의 방송 시간이 비슷하면 누가 TV를 볼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당시에는 보고 싶은 방송을 놓치더라도 지금처럼 바로 다시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래서 프로그램 시작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TV 앞에 먼저 앉아 있는 사람이 유리하다고 느꼈고, 미리 리모컨을 챙겨 두는 일도 있었다. 형제가 다른 채널을 보고 있다면 화면 구석의 시간을 확인하면서 언제 바꿀 수 있을지 계속 신경 쓰게 됐다.
문제는 서로의 프로그램이 자신에게는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는 점이었다. 내가 기다린 만화는 형제에게 그저 어린아이 프로그램처럼 보였고, 형제가 보려는 스포츠 경기는 내게 비슷한 장면이 계속되는 방송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자신의 취향을 기준으로 보면 상대방이 왜 그렇게까지 채널을 고집하는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내가 먼저 봤어”, “어제는 네가 봤잖아”, “이거 끝나면 바로 돌려줘” 같은 말이 반복됐다. 처음에는 채널을 정하는 대화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누가 더 많이 양보했는지를 따지는 문제로 바뀌기도 했다. TV 프로그램 하나가 형제 사이에서 공평함을 계산하는 기준처럼 작용했던 것이다.
리모컨을 먼저 잡는 사람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채널 선택권은 자연스럽게 리모컨과 연결됐다. TV 가까이에 앉아 있던 사람이 리모컨까지 가지고 있으면 원하는 순간에 바로 채널을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잠깐 물을 마시러 갔다가 돌아왔는데 형제가 리모컨을 들고 있으면 내 자리를 빼앗긴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리모컨을 가운데 두고 서로 손을 뻗는 장면도 낯설지 않았다. 한쪽이 먼저 잡으면 다른 쪽은 돌려 달라고 하고, 쉽게 내놓지 않으면 손으로 함께 잡은 채 자기 쪽으로 가져오려는 신경전이 벌어졌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작은 플라스틱 리모컨이 아니라 그날 저녁 무엇을 볼 수 있는지를 결정할 권한이었다.

재미있는 장면이 나오는 순간 상대가 채널을 바꾸면 특히 화가 났다. 광고가 시작됐으니 잠깐 다른 곳을 보자는 말도 있었지만, 광고가 끝났을 때 다시 원래 채널로 돌아오지 않으면 또 문제가 됐다. 서로가 약속을 기억하는 방식까지 달라서 “바로 돌려준다고 했잖아”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돌이켜 보면 리모컨을 차지하려 했던 행동에는 방송을 놓칠까 걱정하는 마음이 크게 섞여 있었다. 원하는 장면을 나중에 다시 볼 수 있다는 확신이 없으니 지금 눈앞의 기회를 지키려 했던 것이다. 리모컨 하나가 그렇게 중요했던 이유도 선택할 수 있는 화면이 사실상 한 대뿐이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중재해도 서로 억울하다는 마음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목소리가 커지면 결국 부모님이 거실로 와서 무슨 일인지 묻는 경우가 많았다. 부모님에게는 채널 하나를 두고 다투는 상황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웠겠지만, 형제에게는 누가 먼저 보기 시작했는지와 어제 누가 양보했는지가 중요한 문제였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다 보면 오히려 말이 더 길어지기도 했다.
부모님은 시간을 정해 번갈아 보라고 하거나, 한 프로그램이 끝난 뒤 다음 사람에게 리모컨을 넘기라고 규칙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공평한 방법이었지만 막상 재미있는 장면이 이어지고 있으면 약속된 시간이 지나도 채널을 바꾸기 싫었다. 먼저 양보한 사람은 상대방도 똑같이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약속이 한 번 어긋나면 이전보다 더 억울해졌다.

때로는 아무도 원하는 프로그램을 보지 못하게 TV를 잠시 꺼 버리는 식으로 상황이 끝나기도 했다. 그렇게 되면 형제 모두가 손해를 봤는데도 한동안 서로 탓하며 말을 하지 않았다. 채널 문제로 시작한 다툼이 결국 상대방의 태도에 대한 서운함으로 바뀌면서 실제 프로그램보다 감정이 더 중요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시간이 조금 지나면 같은 방에서 다시 얼굴을 마주쳐야 했다. 간식을 먹거나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풀리고, 다음날 또 함께 TV를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가족 안의 다툼은 멀리 떨어져 피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결국 다시 관계를 이어가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결국 번갈아 보거나 함께 볼 프로그램을 찾게 됐다
같은 문제로 몇 번 다투다 보면 형제끼리도 나름의 해결 방법이 생겼다. 오늘은 내가 먼저 보고 다음 프로그램은 형제가 보는 식으로 순서를 정하거나, 특정 요일에는 각자 좋아하는 방송의 우선권을 인정해 주기도 했다. 완벽하게 지켜지지는 않아도 최소한 아무 규칙 없이 리모컨을 빼앗는 것보다는 갈등이 줄었다.
둘 다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발견하면 거실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평소에는 서로 다른 채널을 고집하던 형제가 같은 장면을 보며 웃거나 다음 내용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리모컨이 누구 손에 있는지가 중요하지 않았다. 함께 보는 재미를 알게 되면서 꼭 내가 선택한 프로그램만 봐야 한다는 마음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상대방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어쩔 수 없이 같이 보다 예상보다 재미있어서 계속 보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반대로 내가 좋아하는 방송을 형제가 함께 보면서 공통의 이야깃거리가 생기기도 했다. 채널 선택권을 두고 시작된 경쟁이 때로는 서로의 취향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된 셈이다.

지금은 가족 구성원이 같은 시간에 꼭 같은 화면을 볼 필요가 없다. 각자 사용하는 기기와 다시보기 방식이 다양해지면서 원하는 콘텐츠를 서로 다른 시간에 볼 수 있다. 그래서 과거처럼 리모컨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형제끼리 신경전을 벌이는 장면도 자연스럽게 보기 어려워졌다.
그렇다고 당시의 다툼이 불편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누가 먼저 TV 앞에 앉았는지 따지고, 리모컨을 어디에 두었는지 찾고, 광고가 끝나기 전에 원래 채널로 돌아가야 한다고 재촉하던 모습까지 지금은 하나의 가족 풍경처럼 느껴진다. 서로 양보하기 싫었던 감정만큼 같은 공간에서 함께 보낸 시간이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텔레비전 채널 선택권을 두고 형제와 싸웠던 기억을 돌아보면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떤 프로그램을 봤는지가 아니다. 한 대의 TV를 함께 사용하면서 자신의 차례를 주장하고, 약속이 어긋나면 서운해하고, 다시 규칙을 정해 관계를 이어갔던 과정이 더 오래 남았다. 작은 리모컨 하나를 가운데 두고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양보와 협상을 배우고 있었다.
당시에는 내가 원하는 채널을 보지 못한 것이 그렇게 억울했는데, 지금은 무슨 프로그램 때문에 다퉜는지조차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대신 형제와 TV 앞에 앉아 웃고 말다툼하고 다시 화해했던 거실의 분위기는 선명하다. 그래서 그때의 채널 싸움은 사라진 방송보다 오래 남은 어린 시절의 가족 기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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