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세트테이프에 좋아하는 노래를 녹음하던 시절에는 음악을 듣는 일보다 먼저 ‘기다리는 일’이 필요했다. 라디오에서 듣고 싶은 곡이 언제 나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공테이프를 미리 넣어 두고, 손가락은 늘 녹음 버튼 가까이에 있었다. 익숙한 전주가 들리는 순간을 놓치면 다시 같은 노래를 만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너무 일찍 눌러도 DJ의 목소리나 광고가 함께 들어갔다. 그래서 노래 한 곡을 테이프에 담는 일에는 작은 긴장감이 따라붙었다.내가 기억하는 카세트 녹음은 단순히 버튼 하나를 누르는 작업이 아니었다. 어떤 테이프를 쓸지 고르고, 남은 길이를 짐작하고, 방송 주파수를 맞추고, 시작과 끝의 타이밍을 노려야 했다. 녹음을 마치고 나면 테이프 라벨이나 종이에 곡 제목을 적었고, 처음부터 다시 감아 제대로..
폴더폰을 쓰던 시절에는 통화를 끝내는 동작까지 기억에 남아 있다. 상대와 마지막 말을 주고받고 손목을 살짝 접어 휴대폰을 닫으면, 힌지가 움직이면서 짧고 단단한 감촉이 손에 전해졌다. 화면이 사라지고 몸체가 한 번에 접히는 순간에는 ‘통화가 끝났다’는 느낌도 분명했다. 지금의 스마트폰에서는 종료 버튼을 누르면 조용히 화면만 바뀌지만, 폴더폰은 손가락과 손바닥으로 마무리를 직접 느낄 수 있었다.내가 폴더폰을 떠올릴 때 액정이나 벨소리만큼 먼저 생각나는 것도 바로 이 닫는 동작이다. 기종마다 힌지의 탄성이나 소리는 달랐지만, 열고 닫는 행동 자체가 전화 사용의 한 과정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문자메시지를 확인한 뒤 닫을 때, 통화를 마치고 한 손으로 접을 때, 괜히 아무 이유 없이 몇 번 열었다 닫아 볼 때..
학교 수업이 끝나면 모두가 곧장 집으로 향하던 것은 아니었다. 운동장을 빠져나와 골목으로 접어들면 자연스럽게 친구들 발걸음이 문방구 쪽으로 모이곤 했다. 꼭 살 것이 있어서 들어가는 날도 있었지만, 딱히 필요한 게 없어도 친구들이 하나둘 서 있는 모습을 보면 그냥 지나치기 어려웠다. 유리창 안쪽으로 빼곡하게 걸린 문구류와 작은 장난감, 간식이 보였고, 문 앞에서는 누가 무엇을 살지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내 기억 속 문방구는 물건을 사는 가게이면서 동시에 방과 후의 약속 장소에 가까웠다. 학교 안에서는 수업과 쉬는 시간이 분명히 나뉘었지만, 문방구 앞에서는 누가 먼저 왔는지, 무엇을 고를지, 이제 어디로 갈지 정해진 것이 없었다. 몇 분만 머물 생각으로 들어갔다가 친구들이 모이면서 시간이 길어지기도..
문제집이 필요해지면 가까운 동네 서점으로 직접 향하던 때가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작은 서점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새 책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섞여 있었고, 벽을 따라 놓인 나무 책장에는 참고서와 문제집이 빈틈없이 꽂혀 있었다. 필요한 책 한 권을 사러 들어갔을 뿐인데 서가 앞에 서면 생각보다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정확히 어떤 과목의 문제집이었는지까지는 선명하지 않아도, 책등을 하나씩 훑고 몇 권을 꺼내 페이지를 넘겨본 뒤 한 권을 정하던 과정은 기억에 남아 있다. 작은 동네 서점에서 문제집을 샀던 경험은 단순히 책을 구입했던 일이 아니었다. 어떤 책으로 공부할지 직접 선택하고, 그 책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까지가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는 준비처럼 느껴졌던 경험이었다.문제집 한 권..
겨울 아침 교실에 들어서면 차가운 공기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난로였다. 교실 한쪽에서 열을 내고 있는 난로는 단순히 몸을 녹이는 도구가 아니었다. 오전 수업이 시작되고 시간이 조금 지나면 그 위에는 집에서 싸 온 도시락들이 하나둘 올라가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난로 주변의 풍경도 달라졌고, 교실 안에는 밥과 반찬이 데워지는 냄새가 조금씩 퍼졌다.내 기억 속 겨울 교실의 도시락은 그냥 점심 한 끼가 아니었다. 아침부터 난로 위에 올려두고 기다려야 했고, 너무 가까이 두면 눌어붙을까 걱정해야 했으며, 위아래 자리를 바꿔야 골고루 따뜻해질 것 같았다. 학교와 시기마다 난로의 종류와 도시락을 데우는 방식은 달랐겠지만, 추운 교실에서 따뜻한 밥을 먹기 위해 난로를 함께 이용하던 풍경은 많은 사..
첫 월급을 받던 날의 기분은 이상하게도 오래 남는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내가 처음으로 내 힘으로 번 돈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괜히 통장 숫자를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하게 됐다. 그때 나는 나를 위한 물건보다 먼저 누군가를 떠올렸다. 바로 아빠였다. 그동안 집에서 늘 묵묵하게 가족을 위해 애쓰던 아빠에게 내 첫 월급으로 꼭 무언가를 사 드리고 싶었다. 무엇을 드리면 좋을지 한참 생각한 끝에 내가 가장 먼저 고른 것은 전기면도기였다.지금 돌이켜보면 전기면도기는 단순한 생활용품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아빠가 아침마다 면도하시던 모습을 익숙하게 봐 왔고, 오래된 면도기를 쓰며 특별히 불편하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왠지 더 좋은 것을 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첫 월급으로 산 물건이 비싸고 화려할 필요는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