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채팅방에서 처음 친구를 사귀었던 경험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상대의 얼굴이 아니라 닉네임이었다. 누가 어떤 사람인지 거의 알지 못한 채 같은 채팅방에 들어와 짧은 인사를 나누고, 말이 잘 통하면 조금 더 이야기를 이어 가던 시절이었다. 처음에는 낯선 사람이 가득한 화면에서 무엇을 써야 할지 망설였지만, 누군가 내 말에 답해 주면 그 순간부터 채팅방이 조금 덜 낯설게 느껴졌다.당시의 온라인 친구 관계는 지금의 SNS처럼 사진과 일상을 먼저 보여 주는 방식과는 달랐다. 닉네임과 몇 줄의 문장, 자주 접속하는 시간, 좋아하는 음악이나 게임 같은 관심사가 상대를 알아가는 단서가 되었다. 나 역시 처음 온라인 채팅방에서 친구를 사귀었을 때 특별한 사건 하나보다, 짧은 대화가 반복되면서 어느 ..
전자사전을 처음 손에 넣었을 때만 해도 나는 꽤 그럴듯한 공부 계획을 세웠던 것 같다. 모르는 영어 단어가 나오면 바로 찾아보고, 국어사전과 한자사전도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면 두꺼운 사전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다는 점이 무엇보다 편리해 보였다. 작은 화면과 빽빽한 자판, 여러 기능이 들어 있는 메뉴를 하나씩 눌러 보는 일 자체도 신기했다. 학교와 집에서 모두 꺼내 쓸 수 있는 개인 학습도구라는 느낌도 강했다.그런데 막상 전자사전에 익숙해지고 나니 내가 가장 자주 찾아 들어간 메뉴는 사전이 아니라 게임 쪽이었다. 공부를 위해 마련한 기기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단어를 찾는 시간보다 간단한 게임을 붙잡고 있는 시간이 더 길어졌던 기억이 난다. 문제집을 풀다 모르는 단어를 검색하려고 켰다가 정작 게임 한 판을 ..
아파트 놀이터를 떠올리면 미끄럼틀과 그네보다 먼저 사람들이 모여 있던 풍경이 생각난다. 학교가 끝난 뒤에는 아이들이 몰려왔고, 저녁 무렵이면 벤치 주변에 부모들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자연스러웠다. 누가 새로 이사 왔는지, 어느 집 아이가 같은 학교에 다니는지, 단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같은 소식도 그렇게 오갔다. 정해진 모임을 만든 것도 아닌데 놀이터에 나가면 필요한 이야기를 하나씩 듣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휴대전화와 단체 채팅방이 지금처럼 일상이 되기 전에는 동네 정보를 얻는 통로가 지금보다 훨씬 생활 공간에 가까이 있었다. 관리사무소 방송이나 게시판도 있었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다시 전해 주고 경험을 보태는 곳은 놀이터 주변 벤치였다. 아이들이 노는 동안 어른들은 자..
내가 옛 교실을 떠올릴 때 빠지지 않는 풍경 가운데 하나가 교실 뒤편의 환경미화 게시판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거나 교실 분위기를 새로 정리할 때면 뒤쪽 게시판은 그냥 비어 있는 판이 아니라 반 전체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색지와 도화지, 가위, 풀, 자, 사인펜 같은 준비물이 책상 위에 펼쳐지고, 누군가는 제목 글씨를 만들고 누군가는 그림이나 테두리를 맡는 식으로 손을 보탰다.지금처럼 디자인 프로그램에서 틀을 고르고 출력하는 방식이 아니라, 무엇을 어디에 붙일지부터 직접 정해야 했다. 그래서 게시판 꾸미기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 한두 명의 일이 아니라 구도를 잡고, 글자를 오리고, 종이를 붙이고, 멀리서 균형을 살피는 여러 과정이 이어지는 작업이었다. 당시 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이..
처음 휴대폰을 잃어버렸던 날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휴대폰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챈 순간의 당황스러움이다. 평소에는 주머니나 가방 속에 당연히 있다고 생각하던 물건이라 언제 마지막으로 손에 들고 있었는지조차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가방 안쪽을 다시 확인하고 다른 주머니까지 몇 번씩 뒤져 봐도 보이지 않으면 그때부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디에 놓고 왔는지, 이동하는 동안 떨어뜨린 것은 아닌지, 누군가 주워 갔을지 여러 가능성이 한꺼번에 떠올랐다.지금은 휴대폰 위치 확인이나 데이터 백업처럼 분실에 대비할 수 있는 기능이 많아졌지만, 예전에는 사용하는 기기와 시기에 따라 그런 방법이 익숙하지 않거나 제한적인 경우가 있었다. 특히 처음 휴대폰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기기 안에 저장된 연락처와 문자, ..
예전에는 가족사진을 찍고 나면 휴대전화나 클라우드에 저장하는 대신 인화된 사진을 앨범에 한 장씩 끼워 두는 일이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집 안 어딘가에는 두껍고 무거운 사진 앨범 몇 권이 늘 자리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잘 꺼내지 않다가도 명절이나 주말 저녁처럼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면 누군가 앨범을 꺼내 왔고, 그 순간부터 거실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사진을 보기 시작하면 시간 순서대로 넘기기보다 눈에 띄는 장면에서 손이 멈췄고, 그 사진을 아는 사람이 당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내가 기억하는 사진 앨범의 재미는 사진 자체보다 그 옆에서 이어지던 대화에 가까웠다. 오래된 여행 사진, 가족 행사 사진,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면서 서로 기억이 다른 부분을 맞춰 보고, 지금과 전혀 다른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