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가 끝나고 곧장 집으로 가기 아쉬운 날이면 괜히 동네 오락실 쪽으로 발길이 향하곤 했다. 문을 열기 전부터 안쪽에서 들려오는 전자음과 버튼 두드리는 소리가 골목까지 새어 나왔고, 안으로 들어가면 여러 게임기 화면이 번쩍이며 저마다 다른 장면을 보여 줬다. 꼭 게임을 하려고 간 날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가진 동전이 많지 않아도 친구가 하는 모습을 옆에서 구경하고, 누가 오래 버티는지 지켜보는 것만으로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내가 떠올리는 동네 오락실은 단순히 돈을 넣고 게임을 하는 가게보다 조금 더 넓은 의미의 공간이었다. 학교에서는 수업과 규칙이 있었고 집에서는 숙제나 가족의 눈치를 볼 때가 있었지만, 오락실에서는 또래끼리 좋아하는 게임 이야기를 하며 비교적 자유롭게 머물 수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에..
처음 혼자 운전대를 잡았을 때 가장 어려울 거라고 생각한 건 주차나 좁은 골목길 통과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막상 도로 위에 나가 보니 내가 가장 당황했던 순간은 의외로 차선 변경을 해야 할 때였다. 방향지시등을 켜면 자연스럽게 옆 차선으로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실제 도로에서는 그 짧은 몇 초가 생각보다 훨씬 길고 무겁게 느껴졌다. 옆 차선의 차들은 계속 달리고 있었고, 나는 사이드미러와 룸미러를 번갈아 보면서도 도무지 자신 있게 핸들을 꺾을 수가 없었다.그날 나는 내비게이션이 알려 주는 길을 따라가다가 꼭 옆 차선으로 옮겨야 하는 구간을 만나게 됐다. 화면에서는 단순히 “오른쪽 차선으로 이동하세요”라고 말했지만, 초보 운전자에게 그 한 문장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뒤차의 속도도 신경 쓰였고,..
평소에는 학교나 일을 마치고 돌아와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 자연스러웠지만, 가족사진을 찍는 날만큼은 분위기가 달랐다. 평소 자주 입지 않던 단정한 옷을 꺼내고, 구두를 닦고, 머리를 빗어 넘기며 거울 앞에 서던 시간이 있었다. 사진관에 가는 길부터 괜히 자세가 바르게 느껴졌고, 옷에 먼지가 묻지 않도록 조심했던 기억도 가족사진이라는 말과 함께 따라온다.그때의 가족사진은 일상 속에서 가볍게 남기는 한 장과는 조금 달랐다. 온 가족이 같은 시간에 모여야 했고, 사진관까지 움직여야 했으며, 촬영한 사진은 오랫동안 집 안에 남아 여러 번 꺼내 보게 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사진 한 장 속에 평소보다 조금 더 단정하고 좋은 모습을 남기고 싶어 했고, 그 마음이 자연스럽게 옷차림에도 드러났다. 특별히 차려입는..
겨울이 되면 이상하게도 길을 걷는 속도를 늦추게 만드는 냄새가 있었다. 멀리서부터 달큰하고 구수한 향이 퍼져 오면 어디쯤 군고구마를 굽고 있는지 눈으로 먼저 찾게 됐다. 바로 사 먹을 수 있는 간식이 많지 않았던 시절, 길거리 군고구마는 추운 날 일부러 기다릴 이유가 충분한 먹거리였다. 따뜻한 불기운 주변에 서서 아직 덜 익었다는 말을 들으면 아쉬우면서도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내가 기억하는 군고구마의 맛에는 기다리는 시간이 함께 들어 있다. 길가에서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뺐다 하며 차례를 기다리고, 굽는 통에서 피어오르는 김과 냄새를 바라보던 순간은 먹는 시간보다 길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겨울철 길거리 군고구마를 떠올리면 노랗게 익은 속살보다 먼저 차가운 공기, 따뜻한 화로 주변의 온기, 그리고..
골목에서 딱지치기를 하는 아이들 옆에 많은 딱지를 들고 있는 남자아이와 ‘딱지를 많이 가진 친구가 부러웠던 어린 시절’이라는 제목 문구가 함께 보이는 모습학교가 끝난 뒤 친구들이 모여 딱지를 꺼내 놓으면 자연스럽게 시선이 가던 때가 있었다. 누군가는 손바닥만 한 딱지 몇 장만 가지고 있었고, 누군가는 주머니나 작은 상자 안에 두툼한 딱지를 한가득 넣고 다녔다. 내가 유난히 부러워했던 쪽은 늘 후자였다. 딱지를 많이 가진 친구가 하나씩 펼쳐 보일 때면 그 개수 자체가 대단해 보였고, 그중 내가 처음 보는 그림이나 색이 섞여 있으면 괜히 더 오래 바라보게 됐다.어른이 된 뒤 떠올리면 종이 몇 장의 차이였지만 어린 마음에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딱지는 놀이에 쓸 수 있는 도구이면서 모으는 재미가 있는 물건..
비디오테이프로 영화를 보던 시절에는 영화가 끝났다고 해서 바로 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화면에 마지막 장면이 지나가고 재생을 멈춘 뒤에도 VCR 앞에 앉아 ‘되감기’ 버튼을 눌러야 했다. 버튼을 누르면 기계 안에서 테이프가 빠르게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고, 처음 위치로 돌아갈 때까지 잠시 기다려야 했다. 지금처럼 재생 막대를 한 번 눌러 처음으로 이동할 수 없었던 시절이라 그 기다림도 영화 감상의 마지막 과정처럼 느껴졌다.비디오를 다 본 뒤 왜 굳이 되감기를 해야 했는지는 VHS 테이프의 구조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재생하는 동안 자기테이프는 한쪽 릴에서 다른 쪽 릴로 이동했고, 영화가 끝나면 테이프의 대부분이 반대편에 감겨 있었다. 다음 사람이 처음부터 보려면 다시 원래 방향으로 돌려놓아야 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