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전원을 켜고 인터넷 연결을 선택하면 방 안의 분위기가 잠시 달라지던 때가 있었다. 본체 옆 모뎀과 전화선이 이어져 있었고, 연결 버튼을 누른 뒤에는 화면보다 소리에 먼저 귀를 기울였다. 짧은 신호음 뒤로 높고 낮은 전자음이 번갈아 나오고, 금속이 긁히는 듯한 잡음이 이어졌다. 처음 들었을 때는 고장이 난 것이 아닌지 걱정될 만큼 낯설었지만, 잠시 뒤 연결이 성공하면 그 소리가 인터넷으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신호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정확히 어느 날 처음 접속했는지는 흐릿하지만, 전화기와 컴퓨터가 같은 선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던 감각은 남아 있다. 연결음이 끝나기 전까지는 마우스를 괜히 움직이거나 창을 닫지 않으려고 조심했고, 실패했다는 안내가 나오면 같은 과정을 다시 시작했다. 지금은 ..
주머니나 허리춤에서 짧은 전자음이 울리면 하던 일을 멈추고 작은 액정을 들여다보던 시절이 있었다. 화면에 나타나는 것은 문장이 아니라 몇 자리 숫자뿐이었지만, 누구에게서 온 호출인지 짐작되는 순간에는 그 숫자가 짧은 편지처럼 느껴졌다. 전화번호가 찍혀 있으면 가까운 공중전화를 찾아야 했고, 익숙한 숫자 암호가 보이면 전화를 걸기 전부터 상대가 전하려는 분위기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내 기억 속 삐삐는 내용을 자세히 설명해 주는 기기가 아니었다. 화면에 남겨진 숫자와 호출된 시각, 평소 상대가 사용하던 방식까지 함께 살펴야 뜻이 완성됐다. 같은 네 자리라도 친구가 보냈을 때와 가족이 보냈을 때 느낌이 달랐고,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반복해서 호출이 오면 짧은 숫자만으로도 급한 사정이 있다는 것을 짐작했다.삐삐..
학교가 끝난 뒤 문방구 앞을 지나면 과자 진열대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던 것이 있었다. 출입문 옆에 바짝 붙어 있던 작은 오락기였다. 화면에서는 화려한 장면이 쉬지 않고 반복됐고, 조이스틱과 버튼 주변에는 여러 아이의 손때가 묻어 있었다. 주머니 속 동전 하나만 있으면 나도 잠깐 그 화면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정확히 어떤 게임을 하려고 했는지, 동전이 투입구에 걸렸는지 아니면 바닥으로 떨어졌는지는 오래되어 분명하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동전을 넣었는데도 게임이 시작되지 않았고, 손바닥만 들여다보며 당황했던 순간이다. 몇 번이나 반환구를 확인하고 기계 아래를 내려다봐도 동전은 보이지 않았다. 친구들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까지 더해져 작은 손실이 훨씬 크게 ..
저녁 무렵 골목을 걷다 보면 유리문 안쪽으로 비디오테이프 표지가 빼곡하게 보이던 가게가 있었다. 새로 들어온 작품은 눈에 잘 띄는 곳에 세워져 있었고, 이미 누군가 빌려 간 인기작 자리에는 빈 케이스만 남아 있기도 했다. 보고 싶은 영화 제목을 미리 정하고 가는 날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선반 사이를 천천히 돌며 표지와 짧은 설명만 보고 그날의 영화를 골랐다.내 기억 속 비디오 대여점은 단순히 테이프를 빌리는 곳보다 동네의 작은 문화 공간에 가까웠다. 주인은 자주 오는 손님의 취향을 기억했고, 가족과 함께 볼 만한 작품이나 새로 들어온 영화를 알려 주었다. 회원카드와 대여 장부, 반납 날짜가 적힌 작은 종이까지 모두 영화를 보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다.그렇게 흔했던 비디오 대여점이 어느 순간 하나둘 ..
처음 아르바이트를 하던 날에는 평소라면 쉽게 했을 행동도 갑자기 어렵게 느껴졌다. 유니폼이나 앞치마를 정리하고, 누가 무엇을 시키는지 놓치지 않으려고 주변을 계속 살폈다. 손님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보이고 싶었지만, 머릿속에서는 방금 들은 업무 순서를 잊지 않으려고 같은 말을 몇 번씩 되뇌고 있었다.그날 내가 어떤 부분에서 실수했는지는 시간이 지나며 세부가 흐릿해졌다. 다만 해야 할 순서를 놓쳤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고, 주변 사람들이 모두 내 실수를 본 것처럼 느껴졌던 감각은 남아 있다. 첫 아르바이트에서의 실수는 크기보다도 일하는 사람으로서 처음 평가받는다는 부담 때문에 더 크게 다가왔다.그날은 단순히 일을 잘못 처리한 하루가 아니었다. 모르는 것을 어떻게 물어봐야 하는지, 실수가 생..
해가 조금씩 기울기 시작하면 골목 곳곳에서 친구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던 시절이 있었다. 특별한 장난감이 없어도 몇 명만 모이면 숨바꼭질을 시작할 수 있었고, 술래가 벽을 보고 숫자를 세는 동안 나머지는 담장과 대문, 계단과 전봇대 사이로 흩어졌다. 평소 매일 지나던 동네가 그 순간에는 누구도 쉽게 찾을 수 없는 거대한 놀이판처럼 달라졌다.내가 떠올리는 골목 숨바꼭질의 재미는 단순히 몸을 숨기고 찾아내는 데만 있지 않았다. 어디까지를 놀이 구역으로 할지 정하고, 친구들의 성격을 생각해 숨을 곳을 고르며, 술래의 발소리가 가까워질 때 숨을 죽이는 과정 전체가 놀이였다. 정해진 무대도 복잡한 도구도 없었지만 같은 골목이 매번 다른 상황을 만들어 주었다.당시의 골목은 자동차가 지금보다 적고 이웃끼리 얼굴을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