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사진을 찍는다는 말만 들어도 평소와 다른 하루가 시작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처럼 휴대전화로 여러 장을 연속해서 찍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곧바로 지우는 방식이 아니었다. 사진관에 가는 날짜를 정하고, 옷을 고르고, 머리를 단정히 한 뒤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야 비로소 한 장의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내가 기억하는 옛 가족사진에는 촬영 순간만큼 그날을 준비하던 분위기가 함께 담겨 있다. 어른들은 옷매무새를 살폈고 아이들은 낯선 조명과 큰 카메라 앞에서 얌전히 앉아 있으라는 말을 들었다. 완성된 사진을 바로 확인할 수도 없었기에 셔터가 눌린 뒤에는 어떤 표정으로 나왔을지 궁금해하며 며칠을 기다려야 했다.사진관에서 찍은 가족사진은 단순한 기념사진보다 무게가 있었다. 한 번 촬영하는 데 시간과 비용이 들었..
수업이 시작되기 전 가방을 열어 본 순간, 있어야 할 학교 준비물이 보이지 않아 손이 잠시 멈췄던 날이 있다. 정확히 어떤 물건이었는지는 오래되어 흐릿하지만, 집에서 챙겼다고 생각한 준비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당황스러움은 또렷하다. 선생님이 준비물을 꺼내라고 하기 전에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과 친구에게 부탁해야 한다는 미안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그 시절에는 수업에 필요한 물건을 학생이 직접 챙겨 오는 일이 많았다. 공책이나 색종이처럼 평소 가방에 넣어 다니는 물건도 있었고, 미술이나 만들기 수업처럼 그날만 필요한 준비물도 있었다. 하나라도 빠뜨리면 수업을 따라가기 어려웠기 때문에 옆자리 친구에게 빌리는 일이 자연스럽게 생겼다. 내게 그날은 단순히 물건 하나를 빌린 날이 아니라, 도움을 요청하는 ..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곧장 가기보다 동네 슈퍼 앞에서 잠시 멈추는 날이 많았다. 과자나 아이스크림을 사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문을 열자마자 들려오는 주인아저씨나 아주머니의 인사가 익숙해서였다. “왔니?”라는 짧은 한마디 뒤에 내 이름이 붙으면, 가게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동네의 아는 어른을 만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 시절 동네 슈퍼 주인이 아이들 이름을 알고 있던 데에는 특별한 기억력보다 반복되는 생활의 힘이 컸다. 아이들은 같은 시간에 같은 길을 지나며 가게를 드나들었고, 주인은 계산대 너머에서 그 모습을 매일 보았다. 누구와 함께 다니는지, 어느 집 아이인지, 무엇을 자주 사는지까지 작은 정보가 쌓이면서 이름과 얼굴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내가 기억하는 동네 슈퍼는 물건만 사고 나오는 공간이 아니었..
처음 혼자 버스를 타던 날에는 목적지에 도착하는 일보다 버스에 제대로 올라타는 것부터 큰 도전처럼 느껴졌다. 평소에는 가족이나 친구를 따라 움직였지만, 그날만큼은 버스 번호와 방향, 내려야 할 정류장을 내가 직접 기억해야 했다. 손에 쥔 차비보다 머릿속에 외운 정류장 이름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버스가 출발하자 처음에는 혼자 해냈다는 기분이 들었다. 창밖의 가게와 골목을 바라보며 아는 풍경이 나오는지 확인했고, 정류장을 하나 지날 때마다 목적지에 가까워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내려야 할 곳을 지나친 것 같았고, 낯선 이름이 들리자 마음이 급해졌다.결국 익숙하지 않은 정류장에서 내리고 나서야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처음 혼자 버스를 탔다가 잘못 내린 ..
요즘은 보고 싶은 만화를 휴대전화나 태블릿으로 바로 찾을 수 있지만, 예전에는 만화책 한 권이 여러 친구의 기다림을 한꺼번에 품고 있었다. 누군가 새 책을 구해 오면 소식은 금세 퍼졌고, 아직 읽지 못한 친구들은 책이 자기 차례까지 오기만을 기다렸다. 한 사람이 읽고 끝나는 물건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며 이야기가 이어지는 공동의 즐거움에 가까웠다.내가 기억하는 만화책 돌려보기의 핵심은 책의 내용만이 아니었다. 먼저 읽은 친구가 표정으로 재미를 예고하고, 다음 사람은 결말을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으며 순서를 기다렸다. 책 한 권은 얇고 작았지만 그 주변에는 약속, 양보, 자랑, 감상과 같은 여러 감정이 모였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만화책을 빌려 본 것이 아니라 같은 이야기를 시간차를 두고 함께 경..
학교가 끝난 뒤 문방구 앞을 지나면 공책이나 연필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투명한 통 안에 알록달록한 캡슐이 가득 들어 있고, 앞면에는 작은 장난감이나 반짝이는 상품 그림이 붙어 있던 뽑기 기계였다. 손에 쥔 동전은 작았지만 손잡이를 돌리기 전의 기대만큼은 꽤 컸다.무엇이 나올지 알 수 없다는 점이 문방구 뽑기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기계 안에 정말 좋은 상품이 들어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는데도, 눈에 잘 띄는 캡슐이나 안내 그림을 보며 이번에는 운이 좋을 것이라고 믿었다.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상상할 수 있었던 시간이 오히려 상품보다 오래 기억에 남아 있다.기계 앞에서 한참 머뭇거리다가도 친구가 먼저 동전을 넣는 모습을 보면 결심이 빨라졌다. 뽑기는 혼자 하는 선택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