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집 전화번호를 눌러 놓고 수화기 너머의 신호음을 듣고 있으면, 전화를 건 목적보다 누가 먼저 받을지가 더 신경 쓰였다. 운 좋게 친구가 바로 받으면 편했지만, 낯선 어른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머릿속에 준비해 둔 말이 잠시 엉키곤 했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에는 친구와 통화하려면 그 집의 가족이라는 작은 관문을 먼저 지나야 했다.나는 전화를 걸기 전에 친구 이름과 내가 할 말을 마음속으로 정리했다. 그래도 친구의 부모님이 “여보세요”라고 받으면 목소리가 저절로 작아졌다. 짧은 인사와 자기소개, 친구를 바꿔 달라는 부탁까지 제대로 해야 비로소 친구와 이야기할 수 있었다. 지금은 이름을 누르면 바로 연결되지만, 그때의 집전화에는 통화보다 먼저 배워야 할 예의와 눈치가 있었다.친구 집 번호를 누르기 전부..
저녁 식사가 끝날 무렵이면 가족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거실 한쪽의 TV로 향하곤 했다. 집에 TV가 한 대뿐이던 시절에는 각자 보고 싶은 화면을 따로 고르는 일이 어려웠다. 누군가는 뉴스를 기다렸고, 누군가는 드라마를 보고 싶어 했으며, 아이들은 만화나 오락 프로그램이 시작되기만을 바랐다.리모컨 하나와 채널 몇 개를 사이에 두고 가족의 하루가 한자리에 모였다.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달라도 결국 같은 화면을 바라보며 웃고, 설명하고, 때로는 아쉬워했다. 내가 기억하는 가족의 TV 시청은 단순히 방송을 보는 시간이 아니라, 서로 다른 취향과 생활 리듬이 거실에서 잠시 겹치는 풍경에 가까웠다.TV 한 대가 가족의 저녁 시간을 정하던 시절TV가 한 대뿐이면 프로그램 편성표가 가족의 생활시간표처럼 작동했다. 특정 ..
버디버디에 접속하면 가장 먼저 친구 목록보다 내 대화명부터 살피던 때가 있었다. 어제 적어 둔 문장이 오늘의 마음과 맞는지, 누군가에게 너무 티가 나지는 않는지, 괜히 아무렇지 않은 척 보이지는 않는지 한참 들여다보곤 했다. 대화명은 이름을 표시하는 칸이었지만, 그 시절 우리에게는 작은 일기장이자 은근한 신호였다.직접 말하기는 쑥스럽고 아무 말도 하지 않기에는 마음이 복잡할 때, 짧은 문장 하나가 대신 나섰다. 좋아하는 노래 가사처럼 보이는 말, 의미를 알 듯 말 듯한 영어 단어, 일부러 띄어 쓴 문장과 특수문자까지 모두 감정의 일부가 되었다. 버디버디 대화명을 떠올리면 메신저 기능보다도, 마음을 곧장 말하지 않고 살짝 비껴 표현하던 당시의 분위기가 먼저 생각난다.대화명은 이름보다 오늘의 기분을 보여주는..
방학이 시작되던 날에는 시간이 끝없이 많아 보였다. 생활계획표의 동그란 시계 안에는 공부, 독서, 운동 같은 계획을 반듯하게 적어 넣었지만, 정작 내 마음은 방학 동안 무엇을 하며 놀지에 더 가 있었다. 개학은 아주 먼 훗날의 일처럼 느껴졌고, 방학 숙제는 며칠만 마음먹으면 금방 끝낼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래서 하루 이틀 미루던 숙제는 어느새 책상 한쪽에 그대로 쌓였고, 달력의 마지막 날짜에 가까워질수록 보지 않으려 해도 자꾸 눈에 들어왔다. 결국 개학 전날이 되어서야 공책과 색연필, 읽지 못한 책과 밀린 일기장을 한꺼번에 펼쳐 놓았다. 방학 마지막 날의 집 안에는 끝나가는 휴일의 아쉬움보다 숙제를 제시간에 끝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조급함이 더 짙게 감돌았다.방학이 길수록 숙제를 더 미루게 되었던..
학교 수업이 끝난 뒤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동네 골목 안쪽 오락실에 들르던 날이 있었다. 주머니 속에는 며칠 동안 아껴 둔 동전 몇 개가 있었고, 그 작은 금속 조각들이 손바닥에서 부딪히는 소리만으로도 마음이 급해졌다. 문을 열면 여러 대의 브라운관 화면이 서로 다른 색으로 번쩍였고, 조이스틱을 움직이는 소리와 버튼을 연달아 누르는 소리가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그날은 잠깐 구경만 하겠다는 생각으로 들어갔던 것 같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게임 앞에 앉아 동전을 하나 넣고 나면 다음 판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 판만 더 하면 더 멀리 갈 수 있을 것 같았고, 조금 전에 실수한 장면을 이번에는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주머니를 확인할 때마다 동전은 줄어들었고, 마지막에는 집에 돌아갈 때까지..
카세트 플레이어에서 음악을 듣다가 소리가 갑자기 늘어지고 멈추면 가장 먼저 테이프를 꺼내 보곤 했다. 투명한 창 사이로 보이는 갈색 테이프가 느슨하게 풀려 있거나 기기 안쪽에 조금 끼어 있으면, 서랍이나 필통에서 연필 한 자루를 찾았다. 연필 끝을 카세트테이프의 톱니 모양 구멍에 끼우고 천천히 돌리면 늘어진 테이프가 다시 감기는 모습이 보였다.카세트테이프를 연필로 돌려본 경험은 당시 음악을 들었던 사람이라면 한 번쯤 떠올릴 만한 장면이다. 단순히 되감기 버튼을 대신한 행동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테이프의 구조를 눈으로 이해하고 고장 난 물건을 직접 살려보려던 생활 습관이 담겨 있었다. 좋아하는 노래가 다시 흘러나올지 확인하기까지의 긴장감도 이 작은 행동을 오래 기억하게 만든다.테이프가 늘어져 음악이 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