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 전날 밤이면 평소보다 큰 가방을 방 한가운데 펼쳐 놓았다. 도시락과 물통, 돗자리처럼 빠뜨리면 곤란한 준비물이 먼저였지만, 이상하게도 가장 자주 열어 본 곳은 간식이 들어 있는 주머니였다. 봉지를 하나씩 꺼내어 바라보고 다시 넣으면서 내일 누구와 무엇을 나눠 먹을지 머릿속으로 그려 보던 시간부터 소풍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가방 속 간식은 배를 채우기 위한 음식만은 아니었다. 친구에게 건넬 한 줌의 과자였고, 오전 내내 걷고 난 뒤 꺼내 먹을 작은 보상이었으며, 도시락을 다 먹은 다음에도 자리를 쉽게 뜨지 않게 해 주는 즐거움이었다. 어디서든 바로 사 먹으면 된다는 생각이 없었기에 무엇을 챙겨 가느냐가 제법 중요한 고민이었고, 그 고민까지 포함해 소풍날의 기억이 되었다.소풍 전날, 간식부터 펼쳐 놓..
운동회 날 아침에는 평소보다 학교 가는 길이 짧게 느껴졌다. 운동장 위로 만국기가 걸리고 스피커에서 음악과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면, 늘 보던 학교가 하루 동안 다른 장소로 바뀐 것 같았다. 체육복과 운동화를 챙겨 입었지만 마음은 수업을 들으러 가는 날보다 소풍을 앞둔 날에 가까웠다. 오늘은 내가 어떤 경기에 나가는지, 친구들과 어느 자리에서 응원할지, 가족이 언제 운동장에 도착할지가 하루 종일 이어질 궁금증이었다.초등학교 운동회 날 가장 기다렸던 순간은 사람마다 달랐을 것이다. 달리기 순서를 기다린 아이도 있었고, 반 전체가 힘을 모으는 단체 경기를 좋아한 아이도 있었으며, 가족과 도시락을 펼치는 점심시간을 손꼽은 아이도 있었다. 내가 이 시절을 떠올리면 한 장면만 고르기보다 입장식에서 달리기, 점심시간..
학교나 학원 수업이 끝난 뒤 집에 연락해야 할 일이 생기면 나는 가장 먼저 공중전화가 어디 있는지부터 찾곤 했다. 버스 정류장 옆, 지하철역 입구, 학교 근처 문방구 앞처럼 사람들이 많이 지나는 곳에는 유리 칸막이가 달린 공중전화가 있었고, 그 앞에는 이미 몇 사람이 차례를 기다리는 경우가 많았다.지금처럼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바로 전화를 걸 수 없던 때라서, 연락을 한다는 일 자체가 하나의 순서와 준비가 필요한 행동이었다. 동전을 손에 쥔 채 앞사람의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수화기가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면 그제야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던 장면은 당시의 생활 속에서 꽤 익숙한 풍경이었다.전화할 사람은 정해져 있어도 줄부터 서야 했다공중전화 앞에 줄이 생기는 이유는 단순했다. 전화를 해야 하는 사..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접속하면 가장 먼저 시선이 향한 곳은 화면 위쪽의 TODAY 숫자였다. 새 글을 올리지 않은 날에도 어제보다 숫자가 늘었는지 확인했고, 잠깐 로그아웃했다가 다시 들어왔을 때 방문자가 한 명이라도 더 늘면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단순한 접속 횟수일 뿐이었지만, 그 숫자에는 누군가 내 공간을 궁금해했고 내 글이나 사진을 보고 갔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당시 미니홈피는 사진첩과 다이어리, 방명록, 배경음악과 미니룸을 한곳에 모아 둔 개인 공간이었다. 무엇을 올렸는지뿐 아니라 누가 관심을 보였는지도 중요한 경험이었다. 그래서 방문자 수를 매일 확인하는 일은 인기 경쟁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친구 관계를 확인하고, 새로 올린 글의 반응을 기다리고, 내가 꾸민 공간이 누군가에게 ..
보고 싶은 영화를 검색창에 입력하면 줄거리와 예고편, 관람객 평가까지 한꺼번에 확인할 수 있는 지금과 달리, 비디오 대여점에서는 직접 선반 사이를 걸으며 영화를 골라야 했다. 벽면을 가득 채운 비디오테이프 가운데 어떤 작품이 재미있을지는 표지에 담긴 사진과 몇 줄의 설명을 보고 짐작해야 했다. 제목은 낯설지만 표지가 끌리는 작품도 있었고, 유명 배우가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손이 가는 영화도 있었다.비디오 대여점에서 영화를 고르는 과정은 단순히 물건 하나를 집어 드는 일이 아니었다. 오늘은 웃고 싶은지, 긴장감 있는 이야기를 보고 싶은지, 혼자 볼 것인지 가족과 함께 볼 것인지부터 생각해야 했다. 마음에 드는 작품을 찾았더라도 이미 대여 중이라 빈 케이스만 남아 있을 수 있었고, 여러 편을 골랐다가 대여료..
처음 피처폰을 받았던 날은 단순히 새 전자제품 하나가 생긴 날이 아니었다. 가족이 함께 쓰던 집 전화에서 벗어나 내 이름으로 연락을 받을 수 있는 작은 통로가 생긴 날이었다.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크기의 전화기를 몇 번이고 펼쳤다 닫았다 하며 액정 화면과 버튼을 바라보던 장면이 떠오른다. 전원을 켰을 때 들리던 짧은 시작음과 화면에 나타난 배경 그림조차 특별하게 느껴졌다.그전까지 친구와 연락하려면 집 전화로 전화를 걸거나 학교에서 미리 약속을 정해야 했다. 하지만 피처폰이 생기면서 친구에게 직접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밖에서도 연락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지금의 스마트폰과 비교하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지만, 당시에는 전화와 문자만으로도 생활이 크게 달라졌다. 처음 피처폰을 받았던 날의 설렘은 기계의..